몇번을 읽다 덮었던 삼성을 생각한다를 연휴에 몰아서 다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의 본질은 삼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생각'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출간된 지난해 이 책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는 분들도.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비난하는 사람과 지지하는 사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 하지만 이 책은 삼성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그냥 지나치는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생각이란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인데, 실제로 살면서 생각이 아닌 받아들여짐과 익숙함에 따라가는 것에 대한 지적을 했다는 것. 원래 그렇기 때문에, 그래왔기 때문에 넘어가야 하는 일들에 대해, '이의 있습니다'라고 손들고 일어선 것,
잘못된 일을 깨달았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나오는 것과 이미 잘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 중에 저자는 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전자를 택했다.
p116.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라는 속세의 상식은 이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분들은 종종 "우리는 늘 지는 싸움만 한다"고 말한다. 승리하는 불의보다 패배하는 정의를 택하는게 이분들이다. 세상이 진실을 외면해도, 하느님은 진실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이 사제단 신부들을 '늘 지는 싸움'에 내몬다.
p188.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구조조정에는 성공했지만 많은 우수한 인력들이 정부기관, 대학 등으로 빠져나갔다. 회사가 붙잡고 싶어 하는 우수한 인재일수록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다. 반면, 다른 일자리를 얻기 힘든 사람일수록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자리를 지키려 든다. 최사가 임직원을 일회용 소모품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떄, 우수한 인재들이 먼저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사례는 어설픈 구조조정은 회사의 짐을 덜어내기보다 오히려 경쟁력을 깍아낸다는 교훈을 남겼다.
p272 내가 생각하는 '황제식 경영'의 결정적인 폐해는 따로 있다. '황제' 눈치를 보느라 경영자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키울 수 없다는 점이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유능한 경영자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탄생한다.
p274. 멀쩡한 시민을 학살한 전직 대통령이 재벌들에게 거둔 비자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본 뒤에는 아이들에게 대통령의 꿈을 품으라고 권하기가 어려워졌다.
p275. 지도층이 존경받는다면, 아이들에게 학자,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이 되도록 권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지도층에게 배신만 당한 역사였다.
p303 건설 비리 수사도 기억에 남는다. 건설 관련 비리는 워낙 규모가 컸다. 관급공사는 정상적인 경영논리, 경제논리, 기술논리가 통하지 않는 분야였다. 대신, 담합과 로비가 통했다. 이런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 대통령이 된 것은 그래서 슬픈 일이다.
p311 전두환 비자금은 아무리 찾아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전두환 측 변호인이 수사팀이 추적한 150억 원을 갖다 낸 일이 있다. 그런데 자금 내역을 살펴보니, 수사팀이 확보한 목록에 없는 돈이 17억 원쯤 포함돼 있었다. 비자금을 워낙 복잡하게 관리하다 보니, 전두환 측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자금을 실수로 잘못 전달한 것이다.
p383 재벌비리에 관한 판결은 사법부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다름 없다. 국민 직접 선거로 뽑힌 대통령도 어찌하지 못하는 절대 권력인 재벌이 저지른 죄에 대해 평범한 노동자가 저지른 죄와 마찬가지로 공정한 판결을 믿을 수 있을 때, 국민은 사법부를 믿을 수 있다.
p386 썩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현실 앞에서 체념하고 냉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절망이라는 게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다 그런 거지"라는 체념과 냉소 속에서 부패는 관행이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구조가 된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어차피 한통속이면서 왜 호들갑이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지지할 수 없었던 이유다.
p394 어떤 이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그렇게 어울려야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역시 아니라고 본다. 언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검찰에 한정지어 이야기하겠다. 그렇게 모은 정보가 검찰 수사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한국 검찰은 일본 검찰보다 비리 수사를 더 잘해야 마땅하다. 일본 검사들은 외부인과 잘 어울리지 않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식사도, 술도 검사들끼리만 먹고 마신다. 검사가 기업인들과 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런 문화가 일본에서도 '검사의 도'로 통한다. 일본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도 가차 없이 칼을 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검찰과 달리 우리나라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을 제대로 수사한 적이 없다. '죽어있는 권력에 대해서만 제대로 수사할 따름이다. 요즘들어서는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수사도 늘어났다. 군사정권 시절, 독재자를 비판하는 지식인과 양심세력을 잡아들였던 공안 검찰의 행태가 이명박 정부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p411. 발이 넓다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통하는 순간, 원칙이 사라진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친한지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이익을 입은 사람은 자신이 권력자에게 밉보였기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한다.
p431 삼성 비리라는 분기점에서, 한국 사회가 택한 방향은 황당했다. 공무원과 삼성이 결탁한 정황이 드러났는데,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투명한 해명도 없었다. 국민이 낸 세금이 재벌과 특권층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쓰이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공공 부문이 불공정하고 불투명하게 운영된다는 이야기다.
p433 현재의 재벌은 중소기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재벌이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 중소기업에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였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할 여력이 생기지 않는 선에서 납품단가를 정해 왔다.
p434 한국 대기업이 협력업체에게 간신히 생존하는 이익만을 보장하는 것과 달리, 구글은 독창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지니고 시장에 새로 진입한 기업에게 지속적인 연구개발이 가능한 수준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교수는 "새로 창업한 기업과 대기업이 상생하는 게 길게 보면 이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방식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대기업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들다. 신규 창업자가 시장에 진입할 공간을 열어두고, 서로 협력해야 대기업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다. 이런 구조가 없으면 산업 자체가 망한다 결국 대기업도 함꼐 망한다"
p443 어떤 이들은 묻는다. "우리 사회가 다 썩었는데, 왜 삼성만 문제 삼느냐?"라고
언론의 타락은 검찰보다 한참 심각했다. 재벌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와 광고를 바꿔치기하는 언론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깊이 절망했다. 언롱니 비리 앞에 침묵하면, 비리는 갈수록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홍보팀 임원이 건넨 몇 푼 안 되는 촌지와 선물 앞에서 중심을 잃고 흐느적대는 기자들을 보면, 한심하기까지 했다. "언론인의 양심이라는 게 참 싸구려구나"싶었다.
p448 삼성 비리 관련 재판 결과가 나오자, 이런 목소리에 "역시나"하고 힘이 실렸다. 이들은 말한다.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올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자회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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